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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복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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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헌철 작성일08-10-20 09:58 조회7,8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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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복을 누리자 선지자 미가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 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6-8)”라고 증거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를 행함에 있어서도 보상에 대한 대가를 표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보니 자신이 의도하였던 의도하지 않던 간에 자기 공로를 표현하게 되거나, 의식적이며, 때론 형식적일 때도 많다. 그렇다면 ‘진정한 감사는 어떤 것일까?’ 라는 질문과 함께 사도 요한의 증거를 묵상해 본다면, 그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라고 함으로 곧 진정한 감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는 행실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함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돈이 없는 자, 조직이 약한 자, 세칭 가방끈이 짧은 자, 작은 교회 교역자 등은 당연히 인정받지 못한다. 또한 신자들도 ‘그리해서는 아니 된다’고 외치면서도 정작 그러한 무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하다보니 부정과 비리, 비 윤리, 부적법, 비성경적 등쯤은 별로 안중에도 없다. 여기에 무슨 양심이 있고 무슨 선이 있고 무슨 신앙이 있단 말인가? 오직 연자 맷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빠져죽을 일만 자행하는 것은 아닌가(마18:6 참조)? 그런데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러한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천국에 못갈 지라도 손이나 발 또는 눈 등 지체의 일부를 제거할 사람(마8:7-9 참조)은 당연히 없으리라 보기에 회개해야 한다고 외치기도 겁이 난다. 그러면 반드시 “너나 잘해라”라고 조소석인 말로 되돌아 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되 추수할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마9:38)”고 명령 하신다. 왜 그러한 명령을 하신 것일까?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라함이라(마9:37)”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종교 지도자들은 많은데 그들의 행실을 보니 위로받고 구원받도록 할 수 있는 순교적 봉사자들을 찾아볼 수 없기에, 불쌍한 영혼들 곧 구원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자들을 위로하고 안아줄 추수할 일군들을 청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 까지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인가! 탄식만으로는 조금도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수가 없다.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자성하면서, 그 분의 명령을 가슴에 품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내가먼저 봉사하되 믿음의 선진들을 따라 지극히 작은 일에서 부터라도 자신을 내려놓겠다는 결단들이 요청된다. 21C에 무리하게 “이반의 바보”와 같이 살아야 “이반”과 같이 보상을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리라(롬8:36)”는 사도 바울의 증언과 같이 복음의 일군으로써 살아 갈 수는 있지 않은가? 따라서 작금에 교단의 문제, 교회의 문제 등으로 심한 몸살들을 앓고 있는 가슴 아픈 현실 앞에 있을지라도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봉사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복을 누리도록 하자.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11) 기독교신문 0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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