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희’ 목사 가족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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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헌철 작성일13-05-01 17:11 조회7,616회 댓글0건본문
‘한경희’ 목사 가족의 비극 한국장로교회는 1912년 총회설립 기념사업으로 만주에 선교를 개시했고 1933년 제22회 총회는 북만주 강변에 사는 동포전도로 ‘한경희’ 목사를 파송했다. ‘장장림’ 휘하의 군대가 있고 만주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일본군대가 주둔해 있는 반면, 대한 독립 쟁취를 위하여 만주에서 투쟁하는 독립당이 있는가하면 같은 동족으로 공산당이 되어 독립당과 싸우는 무리도 있었다. 이러한 정세를 국내에서도 모르는 바는 아니므로 친구들은 한 목사에게 그 지대는 공산당과 비적들이 많아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한경희’ 목사는 “나라를 잃고 해외에 망명하여 슬퍼하는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여 새 생명을 주고 위로하며 독립정신을 키워주는 만주선교가 나의 사명이다”라며 그는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만주에 부임하여 그 넓은 땅에 흩어져 사는 외로운 동포 하나하나를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그는 1935년 1월 1일 정초임에도 불구하고 북만주 호림현(虎林縣) 지방교회 순방길을 떠났다. 교인4명과 함께 썰매를 타고 1월 4일에 오소리 강변을 지나다가 공산당 비적을 만났다. 그들은 처음엔 돈을 빼앗으려고 희롱하다가 목사임을 알게 되자, ‘한경희’ 목사 일행을 강물에 얼음을 깨고 쓸어 넣어 수장한 것이다. 그는 몸과 마음과 피까지 만주선교에 바쳤고 그 시신조차 간곳을 모른다. 그런데 이에 참으로 놀란 것은 ‘한경희’ 목사 아들 ‘청옥’이가 공산당원 이었던 것이다. 당시 공산당원들은 삼원포를 중심하여 만주전역 민족진영 을 박멸하는데 전력하였다. 그 후 ‘한청옥’은 공산당들과 마주 앉아 민족진영 토벌을 계획하는 자리에서 민주진영의 한 청년이 권총을 들고 들어와 ‘한청옥’의 등을 쏘아 죽였다. 아버지 ‘한경희’ 목사는 공산당에게 죽고, 아들 ‘한청옥’은 민족진영에 의해 죽었으니 사상적 대립은 이처럼 크나큰 비극을 초래했다. ‘한경희’ 목사의 차남 ‘순옥’이도 당시에는 공산당이었으나 아버지가 참형을 당한 후 다시 교회로 돌아와 1944년 만주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평북 양시교회의 부목사로 봉사하다가 8 . 15 해방 후 공산당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일제 36년의 씻을 수 없는 아픔이 낳은 참담한 비극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지금도 우리는 남북 분단의 아픔 속에 있음도 모자라,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등의 대립각이 잔류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면서도 오히려 대립각을 더욱 부추기는 인상을 주는 일부 교계 지도자들에게서 과연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애를 잠식해 버리는 마당에 개혁은 무엇을 외치는 것이 개혁일까? 과연 우리가 외치는 개혁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일까? 참으로 두렵기만 하다. 물론 신학적 의견이 다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단이나 사이비를 경계함보다도, 사상적 틀로만 바라보는 나머지 너무도 쉽게 우파목사, 좌파목사, 운운하는 논리를 쉽게 이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함에도 불구하고 작금에도 과거와 같이 WCC 문제를 신앙적 다름보다는 사상적 논리가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음을, 대한민국 그리스도인들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할 것인가? 박 대통령께서도 WCC의 성공적 개최를 언급한 것으로 볼 때, 좌파들의 집회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따라서 사상적 대립이 낳은 ‘한경희’ 목사 가족의 비극과 같은 일이 대한민국에서는 발생되지 않고, 진정한 개혁주의가 희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신앙적, 신학적, 구원론적, 성경적 외침을 기대해 본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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