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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방향을 돌려라(기독교신문 06년 3월 5일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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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헌철 작성일06-03-08 10:35 조회9,4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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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방향을 돌려라

(2006년 3월5일자 “기독교신문” 기고문)

작금에 ‘윤 모“씨의 일로 진정한 백성들에게 큰 상처가 되고 있다. 그가 누구이기에 정, 관계는 물론 금융, 재계 학계를 총망라 하여 관계치 않은 곳이 없는 것일까? 왜 이러한 일이 발생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아마도 모두가 갖기 위해 속이고 빼앗고 하는 일에 몰두하는 가치관의 혼돈이 나은 결과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의 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한나라의 임금이 병에 들게 되었다. 이에 임금은 “내 병을 고쳐 주는 자에게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한 현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취하여 임금님이 입으셔야 병이 고쳐 진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온 나라 원로, 관료, 백성들은 물론 그 나라의 왕자까지도 그 행복한 자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진정한 행복 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한 숲을 지나는데 어디에선가 들려왔다. “하나님 감사 합니다. 오늘도 일거리가 넉넉하였고 배도 부르니 이제는 잠을 자는 것 밖에 없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려 왔다. 왕자는 자신도 모르게 숲의 한 오두막을 향하고 있었다. 왕자는 병사들에게 그 농부의 속옷을 벗겨 오라고 하였다. 따라서 병사들은 그 농부의 속옷을 벗기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 농부는 너무나 너무나도 가난하여 속옷마저도 입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 까요? 돈에 있나요? 힘에 있나요? 명예에 있나요? 이러한 것들이 없을 때에 불편함은 있을 수 있으나 그 것들이 결코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청운의 꿈을 품고 신학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자신이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 목적의식을 분명하고도 바르게 해야 할 것이다. 혹이라도 그 출발점을 욕심에 두고 있다면 그 결과는 결코 아름답지 못한 수고로 그치게 될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있는 아픈 마음을 먼저 이해 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진정 아픔이 있는 자들과 무지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자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그들의 삶에 깊은 애정을 품을 때에만이 아름답고 보람된 가치의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문의 목적은 지식을 함양(涵養)함으로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인간적 삶을 갖는데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목적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데 있다할 것이다. 인간적 삶의 기준은 세칭 훌륭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분께만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을 들어 살피시나이까 나를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시나이까,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14:1-4) 함과 같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결코 순탄치 만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준비시켜서 쓰시고, 사회는 준비된 자를 쓴다. 결코 두려워 말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만을 바라보라 결단코 가치와 보람을 갖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하기 위하서여는 욕심을 버리라.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군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버려라 권력욕, 명예욕, 금전욕, 음욕 기타 등등 즉 모든 소유욕을 버리지 않을 때에는 진정한 성공자의 삶을 살 수가 없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는 약속의 말씀을 믿는다면 버려라. 그러나 학업에 임하는 자가 학문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한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그 것은 차라리 쌓지 아니함만 못하다. 칼은 한사람을 해 할 수 있으나 잘못된 지식은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을 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고 있으나 이를 실천하는 데는 매우 인색하다. 그 이유는 성공의 기준, 위대함의 기준 등을 어딘가에 잘 못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靑雲(청운)의 꿈을 안고 진학하는 학생들은 그 꿈이 높은 이상이나 벼슬이나, 명에를 취하고자 함 보다는 淸雲(청운) 진정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맑고 깨끗한 마음 곧 하나님나라에 소망을 둔자답게 온유와 겸손을 갖으라.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즉 진정한 행복 자가 어떤 자인가를 말씀해 주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지식을 쌓아 갈수록 오만함으로 가득하다. 지식이 쌓여 질수록, 더 높은 학문을 할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낮아지는 자가 진정한 학문을 한 자이다. 그러나 더욱 교만해 진다면 이는 하지 말아야할 공부를 한 것이다. 그는 오직 자신의 욕심만을 위한 것으로 사회나 신자들에게 큰 아픔과 상처만을 주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학업에 임하는 자는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자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성공만 하면 모두에게 인정받게 되지’ ‘꿩 잡는 것이 매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과정이 무엇이 그리 중요해 결과만 좋으면 되지’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살더라는 등 조롱하는 등식에서 지식을 이용하기 위함이거나, 자신의 욕심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종국에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예수님은 물론 모세나 사도 바울, 모든 사도들이 버렸던 것을 되찾기 위하여 기도하며 몸부림치는 현실 속에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그렇다고 포기하거나 자학 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꿈이나 비전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위하여 더 적극적으로 기도 해야 할 것이다. 단 그 목적의 방향을 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함과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신자들이 가져야 할 진정한 꿈이나 비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을 소망하는 가운데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는 데(롬12:1-2)두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란? 자신을 욕심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먼저 드리는 것이고 먼저 나누고자 하는 데서 시작 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가 자신의 욕심만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오해 하고 있다는데 그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그 목적의 방향을 바르게 갖고 기도하며 그 위에 쌓아가는 학문은 참으로 훌륭한 것이요. 행복한 것이 될 것이며 아름다고 보람이 있으며 가치가 있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드리라. 바치라, 나누어라 가르치는 자 되기 전에 먼저 배우라는 등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학업을 시작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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