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偏見)을 버리자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서헌철 작성일08-10-20 09:57 조회7,817회 댓글0건본문
편견(偏見)을 버리자 ‘윌리암 케리라’고 하면 인도의 선교사로서 크게 성공한 분이며 그를 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는 분이다. 특별히 선교사들에게 있어서는 교과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동시에 언어학자로써 34개 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분이 나이 많아진 어느 날 인도를 방문하게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윌리암 케리’에게 망신을 주겠다는 심사에서 ‘윌리암 케리’가 본래는 수선공이었다는 것을 들추어. “선생님, 선생님은 선교사가 되기 전에는 구두를 만드는 사람 이었다면서요?”하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윌리암 케리’는 아무런 불만도 없이 싱글 벙글 웃으면서 “아닙니다. 선생이 잘 모르셨습니다. 나는 구두를 만드는 재주는 없었고 구두를 기웠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우리가 정치 경제문제, 남북문제 등은 물론 특히 교단문제, 교회문제, 신앙문제에 있어서는 더욱이 편견에서 자유로울 때에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편견에 사로잡힌 자는 너는 죽고 나는 살아야 한다는 논리로 접근한다. 즉 편견은 반드시 자신의 정욕이 전재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기에 그 무엇이든 편견에서 접근 될 때에는 아름다운 열매란 그 시작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소란과 부작용의 단초를 제공하는 계기만 될 뿐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 그 길 만이 내가 사는 길이요 나아가 한국교회가 사는 길이요 또한 세계선교에도 그 기초를 바로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외적소명 내적소명을 귀가 따갑도록 듣고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외적소명에만 자족하는 신앙이야 말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만 증거 되는 삶의 내적소명의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면 그는 정말 불행한 자가 아닌가? 따라서 내 자신이 외적은 물론 내적 소명을 받은 것을 감사하며 그 은혜를 누림을 감사하는 생활의 한 부분으로써 편견을 버리고 겸손히 행하는 복을 누려야 할 것이다. 풍자와 위트의 작가 ‘버나드 쇼’가 어느 날 평소에 ‘로뎅’을 싫어하는 미술 평론가들을 모아 놓고 자기가 소장하고 있던 여러 가지의 미술 작품들을 내어 보이고 있었다.“이것은 내가 최근에 입수한 로뎅 작품이지.....어떻소?” 그들은 이러니 저러니 하다가 결국은 형편없는 작품이라는 방향으로 의견을 몰아갔다. 이것을 듣고 있던 ‘쇼’ 가 시치미를 떼고 “엇, 내가 잘못 소개 했군, 이것은 ‘로뎅’의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것 이었군, 이것도 그렇게 보잘것없는 것인가요?” 그들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임종국 구자익 엮음. 동서일화집 동아출판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복음신문 08.10.1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