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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기도를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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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헌철 작성일08-11-25 09:12 조회8,1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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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기도를 드리자 정확한 통계를 산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떠도는 풍문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가 아직도 점쟁이 집을 찾는가하면 또한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받는 다는 사람들에게 세칭 예언을 듣기 위하여 좇아 다니는가하면, 그러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신의 권위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면서 그러한 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은 것 인양 포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더욱이나 작금에 수능 시험을 앞두고는 사찰이나 무당집 등을 찾는 이들이 만이 있단다. 그러데 우리 교회들도 이에 뒤질 새라 경쟁적으로 수능시험을 위한 기도 모임을 갖고 있다. 물론 기도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그 모자람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왜 기도하고 있는가? 의문을 갖게 한다. 물론 자신을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적으로 함께 하여 주시길 기도 하리라 본다. 그러나 자 못 그와는 달리 아무 노력도 없는데다가 내적 은혜도 없이 단순히 미신적 기도를 하는 것이 라면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이를 조장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외친다면 참으로 우려스럽지 않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어린아이로만 있으라고 강조해야 한단 말인가? 특히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3-4)”는 말씀 등의 순수성을 왜곡하여 아무데나 찍어 붙인 것까지도 참 신앙인 것같이 인용함으로 혼잡에 빠지게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면, 만돌 이의 아빠는 요즘 애들이 너무 응석받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돌 이가 눈이 조금 온다고 300미터도 안 되는 학교까지 차를 태워 달라고 졸라 대자 어이가 없었다. “학교까지 태워달라고?” 그는 소리쳤다. “만돌 아,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발을 둘이나 주셨다고 생각하니?” 그러자 만돌 이는 대답했다. “한 발은 브레이크를 밟고 다른 발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라고요.”(고정식 지음 웃기는 철학) 진정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이야기 같지만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만돌 이와 같은 요구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그보다는 두 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는 말씀과 같이 우리기도가 우리의 정욕대로만 이루어지다가는 결국은 무슨 열매들을 맺을까? 성경에 이르기를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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