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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하지 않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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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헌철 작성일12-04-18 13:18 조회6,0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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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하지 않기를 기도합시다. “사랑”은 너무도 보편적인 말이 되어 버린 것일까? 그래서인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마저 그 진정성을 찾아보기란 흔치 않은 감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은 아무나 하나”하는 유행가 가사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명령 하셨음을 잘 알고는 있음에도, 정작 행동에 있어서는 타자의 아픔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만 앞세우는 나머지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란 상처는 모두 안겨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인간이 다 그렇기 때문일까요? 명예욕? 권력욕? 아니면 정도를 포기할 수 없기에? 또는 복음을 사수하기 위해서? 수많은 생명들을 위해서라는 등의 요인?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해 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지 않나요? 물론 필자와 그들의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래도 그렇지 과연 그들의 주장과 함께하는 행동들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하는 의구심은 저버릴 수가 없군요. 예수님께서는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0-28)라고 말씀 하셨기에 더욱 그러하다. 소설가 “김려령”씨는 그의 장편소설, “가시고백”에서 “내 삶의 어느 부분은 싹둑 잘라내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 그 때 기억을 잃었습니다.” 하고 시치미를 떼고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내가 한 행동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만난 누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행동이 싫었고 어떤 사람이 싫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살아보니 그런 일을 겪어서 참 다행이구나 싶은 것입니다. 생의 결이 좋은 추억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이제는 돌아가 다시 마주하고 싶은 추억과 사람이 더 많습니다. 해질녁 엄마가 부를 때 까지 함께 했던 친구들과 그 놀이를 다시하고 싶고, 버스에서 내리다 발을 헛디디며 비상구 캐릭터처럼 엎어진 내 모습을 봤다는 이유로 사랑고백을 거절했던 그 사람에게 “사실은 나도 사랑했다고 고백하고도 싶습니다. 삶의 근육은 많은 추억과 경험으로 인해 쌓이는 것입니다. 뻔뻔함이 아닌 노련한 당당함으로 생과 마주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합니다. 살아보니 미움보다 사랑이 그래도 더 괜찮은 근육을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내가 아직 철이 덜 들어 미운사람 여전히 미워하지만 좋은 사람 그냥 떠나보내는 실수는 하지 않으려 합니다.” 라고 말한다. 그렇습니다.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불리는 우리도, 이제 철이 들 때가 되지 않았나요? 그럼으로 “나도 당신을 사랑했습니다.”라고 건네며, 일 잘하겠다고 하시는 분들부터 “예수님의 말씀을 품고” 분열의 원인이 되는 돌을 놓는 실수는 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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