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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09] 칼빈과 제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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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5-06-14 20:05 조회7,2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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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16세기 종교개혁의 쌍두마차는 루터와 칼빈이었다. 츠빙글리, 멜란히톤, 녹스 등 다른 많은 인물들이 종교개혁을 위해 헌신했지만 이 두 사람은 종교개혁의 발상지인 독일과 스위스의 반 교황청 운동을 각각 주도했다. 루터의 가르침은 북부 유럽, 칼빈의 사상은 서부 유럽으로 뻗어나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양대 흐름을 형성했다. 한 세대 차이가 나는 루터(1486~1546)와 칼빈(1509~1564)은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었다. 루터는 신부가 되기 전 문학과 음악을 공부했던 사람답게 격정적이었고, 법률 전문가로서 훈련받은 칼빈은 냉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루터가 술을 좋아했던 반면 칼빈은 음주를 죄악으로 간주했다. 루터가 이론적인 측면은 측근들의 도움을 받으며 주로 정치적인 활동으로 각광받았던데 비해 칼빈은 치밀한 신학적 연구 작업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이론적 토대를 놓았다. 또한 루터가 스스로의 힘으로 비텐베르크를 역사의 무대로 만들었다면 칼빈은 거꾸로 제네바의 종교개혁이 낳은 인물이었다. 제네바의 도심 한복판 바스티옹 공원에 있는 '종교개혁 기념비'는 이 도시의 종교개혁 역사를 잘 말해준다. 길이 100 , 높이 10 의 거대한 대리석 비석이 세워진 것은 1936년 5월. 도시국가 제네바가 프로테스탄티즘을 받아들인 지 꼭 400년 되는 때였다. 칼빈의 정신을 따르는 전 세계의 개혁파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성금을 모아 기념비를 만들기로 했지만 모든 우상과 기념물을 거부했던 칼빈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논란도 있었다. 종교개혁 기념비 중앙에는 제네바 종교개혁의 주역이었던 파렐, 칼빈, 베즈, 녹스 네 사람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파렐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초기에 주도한 인물이다. 베즈는 칼빈주의의 훈련장인 제네바 학술원(현재의제네바 대학)을 창설했으며 칼빈의 후계자가 됐다. 녹스는 제네바 망명 중 칼빈의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스코틀랜드에 칼빈주의를 따르는 장로교회를 만들었다. 석상 좌우로는 제네바 종교개혁의 표어인 '어둠 뒤에는 빛이 온다(POST TENE BRA LUX)'는 글귀가 크게 써 있었다. 프랑스 사람 칼빈 역시 종교적 망명자로 제네바에 왔다. 가톨릭교회의 장학금을 받으며 법학을 공부한 칼빈은 유럽을 휩쓰는 종교개혁의 열풍 속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됐다.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정부의 박해를 피해 칼빈은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중심지 바젤로 가서 신학을 연구했다. 그 결과는 종교개혁 최대의 이론적 성과로 꼽히는 '그리스도교 강요'로 완성 됐고 이 책은 그에게 전 유럽적인 명성을 안겨 주었다. 칼빈이 제네바에 정착한 것은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여행길에 들른 칼빈을 붙잡고 몇 달전 프로테스탄티즘을 받아들인 제네바 시민들을 교육시켜 주도록 강권한 사람은 파렐이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생피엘 교회의 부속 건물에서 프로테스탄트 이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어 한동안 제네바를 떠났던 칼뱅은 32세가 되던 1541년, 도시 운영 전반에 대한 상당한 권한을 보장받고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는 베즈 등의 도움을 받으며 생피엘 교회를 거점으로 신학사상, 예배양식, 교회조직 등에 대한자신의 생각을 하나하나 실천해갔다. 제네바의 상징 레만호에 기대어 구 시가지를 바라보면 언덕 위로 첨탑이 하늘을 찌르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생피엘 교회이다. 오늘날 생피엘 교회의 모습은 칼빈의 이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종교개혁 전 내부에 많은 성상과 성화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모두 철거되고 지금은 십자가조차도 없는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칼빈이 사용했다는 의자도 한쪽에 방치되다시피 놓여져 있어 관람객을 의아하게 한다. 흔히 칼빈의 종교개혁을 '신정정치'라고 표현한다. 철저하게 신앙과 정신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던 루터와는 달리 칼빈은 신앙과 정치, 사회의 일치를 추구했다. 그는 제네바의 공식적인 통치권을 갖는 위치에 있지 않았지만 사실상 절대권을 행사했다. 칼빈으로부터 시작 된 독특한 기구인 장로회의는 종교뿐 아니라 사회 전반을 관장하는 역할을 했다. 칼빈은 또한 종교개혁 이념을 유럽 다른 지역에 전파하는 데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칼빈은 모국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깊이 관여하는 한편 탄압받는 프로테스탄트들의 망명을 환영했다. 제네바의 많은 건물이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옥상을 늘려 집을 새로 지었다. 그래서 제네바는 칼빈 당시 이미 '프로테스탄트의 로마'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지나친 종교개혁의 열정은 부작용도 낳았다. 로마 교황청의 '독재에 저항했던 칼빈 스스로 종교적 신념의 차이를 이유로 반대자를 화형에 처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스페인 출신의 세르베투스라는 학자가 예수의 신성을 부인 한다는 이유로 제네바에서 체포됐고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화형을 당했다. 이 논의는 베즈가 주도했지만 칼빈의 동의 없이 화형이 집행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종교개혁의 열풍이 가라앉은 다음 제네바 시민들은 이 같은 역설을 깨달았다. 세르베투스가 화형된 자리에는 지금 칼빈의 결정은 종교개혁과 복음주의의 원칙인 '양심의 자유'에 어긋났다는 자기비판을 담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칼빈은 모든 영광은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하고 인간은 찬양과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굳은 신념을 가졌다. 그는 죽을 때 장례를 치루지 말고 무덤에 어떤 표시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제네바 공동묘지에 있는 칼빈의 무덤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다. 훗날 그의 무덤이 잊혀질 것을 염려한 사람이 'JC'라는 글자가 새겨진 작은 돌을 세워놓았을 뿐이다. 지금의 묘지석과 보호 철책은 아시아 신자들이 칼빈의 묘지를 많이 찾자 최근에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개신교 신자의 70% 가까이는 칼빈주의를 따르는 그의 정신적 후손들이다. 칼빈이 지금 한국을 찾아와 하늘을 찌를 듯한 예배당과 그 내부의 화려한 장식, 모든 영광을 하나님 대신 목회자들이 받는 것 같은 일부 교회 모습을 보면 무엇이라고 말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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